김여운의 회화
이름 모를 들풀의, 혹은, 이름도 없는 것들의 윤리학
전시장에 들어서면 크고 작은 텅 빈 캔버스가 걸려있다. 하얀 캔버스에 하얀 사각형을 그린 절대주의 회화인가(말레비치). 아니면 회화가 가능한 필요충분조건을 평면이라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환원한 미니멀리즘인가(클레멘테 그린버그). 그도 저도 아니면 텅 빈 캔버스를 보고 당혹해할 사람들이라는 상황 논리를 겨냥한 개념미술인가. 미술사에서 보고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 전시를 통해 확인해본 적은 없는 만큼 텅 빈 캔버스가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환원주의 혹은 금욕주의와 결합한 후기 미니멀리즘이라고 불러도 좋겠군, 하고 돌아서려는데 얼핏 화면 속에 알 수 없는 얼룩이 보인다. 사실은 캔버스 천을 찢고 그 틈새로 고개를 내민 싹이 그려져 있었다. 실제로 전시장에 돋보기를 비치해놓기도 했지만,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떡잎에 난 보송보송한 털이며, 캔버스가 찢어진 가장자리의 올 하나하나가 오롯한 것이, 그리고 여기에 그림자마저 생생한 것이 영락없는 실물 같았다. 작가가 오며 가며 본 이름 모를 들풀이라고 했고, 실물 크기 그대로라고 했다.
그러나, 저 큰 캔버스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작은 들풀 하나를 그렸다니. 정말 비효율적이군, 이라고 했지만 정작 작가는 그 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작가는 회화적 관습을 문제시하고 있었다.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의미 포화 상태의 현대미술에 대해 꼭 필요한 말과 이미지로 한정하고 싶었다고 했다. 스펙터클 한 시대에 던지는 검소한(혹은 같은 의미지만 검약한) 말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한정에는 윤리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여기에 작가는 적정 거리 혹은 심적 거리를 문제시한다. 그림을 더 잘 보기 위해서 요구되는 거리를 의미하며, 그림을 넘어서 삶의 태도와 같은 상황 논리에 확대 적용되는 개념이다. 작가는 그 거리, 그 개념을 수정하는데, 작가의 그림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선 그림에 바짝 다가가야 한다. 주의 깊게 보아야 하고, 세심하게 보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못 본 채,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못 본 채 지나치기 쉽다.
무슨 말인가. 앞서, 이름 모를 들풀이라고 했다. 이름도 없는 것들이라고 해도 좋을, 사실은 지천이지만 없는 거나 매한가지인 존재들이다. 이 미물들이 봄이면 언 땅을 깨고 고개를 내민다. 보도블록 사이로 뿌리를 내리고, 시멘트 바닥을 뚫는다. 창틀에 쌓인 먼지에서도 자라고, 마침내 캔버스 천을 찢고 나온다. 혹자는 이처럼 새싹이 언 땅을 깨고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고도 했지만, 실제로 소리가 들린다기보다는 심적으로 공감하는 소리를 듣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존재에 대한 공감이다. 존재의 살림살이를 보기 위해선, 존재가 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선 존재에 대한 공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 그 존재는 이름도 모르고, 이름도 없다. 조르조 아감벤은 법으로부터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인간을 호모 사케르, 그러므로 발가벗은 생명이라고 했다.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이름 모를 들풀들, 그러므로 이름도 없는 존재들에 대한 유비적 표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어쩌면 우리 미물들 그러므로 타자들이 사는 치열한 삶의 소리를 보고 듣기 위해선 주의 깊고 세심해야 한다. 겨우 보이고, 바짝 다가가서야 비로소 보이는 작가의 그림의 숨은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다시, 타자의 삶에 대해 깊고 세심한 주의를 요청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측면이 있다.
그런데 정작, 이처럼 이름 모를 들풀들, 그러므로 어쩌면 이름도 없는 존재들 하나하나에 작가는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 안젤리나, 하나, 소피, 안나, 에바, 루이스, 미아, 버지니아, 리사와 같은. 그리고 관객들도 작가처럼 저마다 풀들에게 이름을 불러주라고 요청한다. 연대를 요청해오는 관객참여형 프로젝트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는 김춘수의 시를 떠올리게 된다. 처음부터 이름도 없는 것들은 없다. 처음부터 무의미한 것들은 없다. 처음부터 미물(타자)들은 없다. 다만 이름을 불러주는, 의미를 발견하는, 타자를 인정하는 누군가가(혹은 행위가) 없었을 뿐. 그러므로 이름 모를 풀들에게 이름을 불러주는 이 프로젝트에는 타자(성)의 초대가 있고, 자기_타자의 맞아들임이 있다(에마뉘엘 레비나스).
그리고 여기에 집주인이 있고,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있었다. 집주인은 여하한 경우에도 집에 못을 박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세 사는 사람이 이사 가고 난 뒤에 벽에 박힌 못을 발견했다. 아마도 집주인마저 눈치채지 못할, 쉽게 찾기는 힘든, 후미진 곳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도 삶의 방법은 찾아지고 있었고, 치열한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어쩌면 나의 인식(보다는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도 치열한 삶을 살고 있었던 이름 모를 들풀처럼. 그러므로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못 그림(정확하게는 벽에 못을 박은 그림)은 제도가 그어놓은 금을 넘어서 삶의 방책을 찾아내고야 마는, 여하한 경우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당위처럼 읽히고, 금기와 위반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그렇게 작가는 이름 모를(그러므로 어쩌면 이름도 없는) 들풀 같은 존재들의 치열한 삶의 순간에 주목하게 만들고, 후미진 구석에서도 계속되는 삶의 현실에 눈뜨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 세 개의 기둥이 서로 기대어 서 있는 입체 설치작업이 있다. 세 개의 기둥이 마치 한 몸인 양 하나로 묶여 있는데, 하얗게 도색 된 표면에는 Life와 Variable(변수)과 같은 영문자가 기록돼 있다. 아마도 삶의 지침을 적어놓은 것일 터이다. 삶의 표상 혹은 푯대라고 해야 할까. 혼자서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서로 기대어야 하고, 협동해야 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 과정에 예기치 못한 변수가 매개될 수 있다. 삶이 꼭 그럴 것이다. 김지하는 삶을 기우뚱한 균형, 그러므로 유격에 비유했는데, 아마도 변수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인간다움이 본인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고 했다. 여기서 작가가 추구하는 인간다움이란 인간중심주의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제도에 반하는 인간, 제도의 잣대가 아닌 자기의 잣대로 서는 인간, 그러므로 자율적인 인간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업은 자율적인 인간 간 연대와 협동을 의미할 것이다. 형태는 다르지만, 두벌의 옷이 마치 한 몸인 양 하나로 들러 붙어있는 작업을 매개로 협동을 주제화한 요셉 보이스의 작업을 떠올리게 된다. 계몽(교육)을 매개로 사람들의 의식에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요셉 보이스의 사회조각에 대한 공감과 유대를 떠올리게 만든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가를 망가진 세계를 수선하는 사람에 비유했다. 안젤름 키퍼는 세계를 불태워 내년 농사를 기약하는 화전민에 비유했다. 작가 역시 어쩌면 이런 수선공과 화전민에서 예술의 당위를 얻고, 예술을 위한 실천 논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이름 모를, 그러므로 어쩌면 이름도 없는 들풀 같은 존재들에, 후미진 구석에서 계속되는 치열한 삶의 순간들에, 그리고 자율적인 인간 간 연대에 주목한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것들, 나의 인식(보다는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것들, 그러므로 진즉에 거기에 있었던 존재들에 눈뜨게 만든다.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거기 있다, 라고 명명한다. 아마도 진즉에 거기에 있었던 존재를, 거기에서의 치열한 삶의 현실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2023년 7월, 고충환(미술평론)
시각 매커니즘과 그 확장 과정으로부터의 인간읽기
김여운 작가의 작업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인간의 형상을 주요하게 다루거나 인간의 감성을 표현한 작업은 아니다. 다만 인간의 존재적 상황에 대한 탐색과 관련되어 있음을 작업의 내용을 읽어가는 가운데 알게 된다. 그의 작업을 살펴보면 캔버스의 프레임과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주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프레임은 벽에 걸려있는 상태가 아니라 공중에 매달려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캔버스로부터 쏟아져 내린듯한 이미지들이 매달려 있는데 이미지가 조각조각 분해되어 있는 모습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 주제를 ‘1.2.4.’라고 하였다. 이는 하나의 세포가 둘, 넷, 여덟 등으로 계속 분열하는 과정에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처럼 수열에서의 수학적 개념을 작가가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작가는 수의 질서와 원리처럼 인간 안에도 유한과 무한이 동시에 들어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 역시 수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작가는 그의 작업에서 수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파편화된 이미지로 대체시킨다. 작가의 작업에서 보이는 조각난 이미지들은 이미지의 확산이자 수의 무한한 증가 가능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파편화된 이미지들은 한 대상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의 시각, 즉 서로 다른 이미지로서 수집된 것이자 분리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 이미지들은 여러 각도의 시각이자 서로 다른 이미지일지라도 만일 2차원의 한 평면 위에서 구성되고 조합된 것이라면 이는 한 개의 이미지라고 지칭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 이미지는 캔버스의 프레임 안에 한정된 하나의 작품으로서 한 이미지일 것이고, 동시에 이러한 평면 작업은 관습적으로 당연히 눈 높이의 벽에 디스플레이 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김여운 작가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이미지들은 그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시작하여 둘로, 넷으로 계속해서 분할되는 이미지의 모습이고, 이것은 일반적인 회화나 사진에서의 시각적 구조인 원근법적 공간이나 이미지의 통일성을 허물어뜨리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이미지들이 공중에 매달아 둔 일그러진 캔버스에 놓여있다가 분리되어 여러 개체로 분해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 이미지들은 여러 시점과 장면이 포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세부적인 것을 자세히 보게 된다면 이 이미지들은 일견 하나의 캔버스와 연관된 것처럼 같아도 본래의 통일된 하나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작가가 언급한 바에 의하면 이렇게 파편화된 이미지는 하나의 이미지로 보이는 것 안에 담겨있을 수 있는 수많은 이미지들에 대한 경우의 수이자 유한성 안에 겹쳐져 있을 무한성의 표본 중 일부인 것이다. 작가는 이를 ‘인간의 도식’, ‘인간의 초상’이라고 지칭하였다. 이와 같은 작가의 언급은 그가 하고 있는 작업이 결국 인간 혹은 인간의 존재적 상황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김여운 작가가 그의 작업에서 인간 대한 그의 시각을 이처럼 캔버스 프레임과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로 대체하여 비의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작업이 그 이전의 평면 작업에 대한 반성적 지점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말해준다. 작가에게 있어 회화와 같은 평면 작업은 세계를 바라보는 것에 있어 프레임 안에 가두는 것이자 자신의 존재적 위치를 평면 공간 안에 한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던 것 같다. 르네상스시대 이래 전통적 맥락 가운데 있는 회화 등 평면 작업들은 단일 시점과 원근법적 공간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작가에게 있어서의 한가지의 질서를 향한 평면 작업이라는 것은 규정된 범주 내에서 바라보고 사유하게 만드는 폐쇄구조로 느껴졌고 한 인간으로서 한계를 체감하는 정신적 기제로 작동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의 망막에 비춰진 세계라는 것은 2차원 평면으로 수렴되는 구조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근거에서 보면 회화나 사진과 같은 평면 기반의 매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시각 매커니즘과 사유 매커니즘을 그대로 닮아 있다고 볼 수도 있으며 동시에 인간의 시각과 사유 구조의 연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시각과 사유가 프레임과 평면이라는 범위 내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은 작가에게 있어서 어느 순간 인간의 한계지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의 작업을 이 그 한계지점에서의 시각과 사유의 메커니즘 자체와 함께 그것의 확장 가능성에 대해 탐색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작업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김여운 작가의 현재 작업의 목적은 평면 매체에서의 한계지점에서 이를 파편화 하고 이것을 연쇄적으로 확산시키는 과정에서 그 해체의 과정 전체를 점검하는 가운데 그 한계에 도전하는 것에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김여운 작가가 수행하는 작업의 또 다른 목적은 프레임과 같은 한계 내의 잠재되어있던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 무한성으로 확장시키고 탈바꿈시키는 동인을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여운 작가의 작업은 결과적으로 평면 작업에서의 프레임과 평면 그리고 이미지로부터 발생되는 조형적 한계지점에 대한 문제의식을 인간의 시각과 사유의 문제로 환원하여 살펴보고 그로부터 대안을 찾아 가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프레임과 평면의 2차원적 한계 안에 머무르게 된다면 인간의 시각과 사유의 지평마저 그 안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작가는 그 경계를 넘어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향하는 방법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이미지의 시공간적 확장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고 작업에서는 그 프로세스를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작가는 프레임과 평면으로부터의 확장적 변화, 즉 이미지의 파편화 혹은 분화 과정에 대해 그 연쇄의 얼개를 확인해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것이 곧 인간의 시각 구조 및 이와 연계된 사유 구조를 드러내 보이도록 하였다. 결국 김여운 작가는 시각예술의 작업 프로세스 그 자체의 문맥을 인간의 사유의 메커니즘에 연결시켜 이를 시각화 함으로써 인간의 존재론적 위치를 점검하고 유한한 인간에 내재된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시각적 영역 안에서 인식할 수 있는 장치로서의 작업을 구성해냄으로써 인간에 대한 탐색 작업에서의 자신이 체득하게 된 사유방식을 관객이 경험적 함께 감각하고 공유할 수 있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2017년 10월, 사이미술연구소 이승훈
깊이를 더해가는 사고의 실험에 대하여
“Not to be confined by the greatest, yet to be contained by the smallest, is divine.”
16세기에 살았던 이냐시오 로욜라(St. Ignatius Loyola)의 묘비명에 나오는 문구다. 이 문구는 200년 후 횔덜린(Fridrich Hölderlin)의 명작 『히페리온(Hyperion)』의 대전제로 사용되었다. 이 문구를 200년 후 프랑스 철학자 장 뤽 낭시(Jean-Luc Nancy)가 『현전으로의 탄생(The Birth to Presence)』에서 다시 사용했다. 어떤 것이 제아무리 위대하더라도 능가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리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기꺼이 품어준다. 그런 것이 과연 있을까? 있다 해도, 우리는 그 이름을 알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그런 것이 없다 해도, 우리는 그 이름을 부르려 하고 들으려고 한다. 우리는 매우 유한한 존재이다. 그러나 무한한 것이 있음을 아는 존재이다. 이 유한한 존재의 생각 자체는 무한하다. 예술은 무한을 이야기하려는 인간의 의지이다. 그런데 인간이 어째서 무한을 생각하고 무한을 표현하려고 하는가? 내가 말하려는 김여운 작가의 의도는 이와 관련되어 있다.
그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최초에 의사소통을 위해서 땅바닥에 무언가를 그렸을 것이다. 소통이 잘 되었을 것이다. 소통이 되면 공통된 관심사가 펼쳐지고, 그 관심사는 내일에 대한 염려였을 것이다. 불안한 내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무한한 것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무한정 펼쳐진 먹을 것을 그려놓으면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위로도 되었을 것이고 의욕도 생겨났을 것이다. 이러한 그림의 행위는 나중에 제사로 발전되었고 제도화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사는 마술의 세계이다. 이 마술의 세계를 비판하기 위해서 문자가 태어났다. 마술은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림은 구슬이며 문자는 구슬을 꿰는 실이다. 문자는 숫자와 결합하여 세계를 코드화시켰다. 코드화는 흐트러진 구슬들을 모아 정리해주는 구슬 끈처럼 세계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게 해준다. 코드화는 바로 방정식이며 근대과학을 낳았다. 나중에 과학기술은 카메라 렌즈와 컴퓨터 발명까지 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컴퓨터의 이미지는 0과 1이라는 이진법이 만들어낸 것이다. 최초의 마술인 이미지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문자가 오히려 더욱 정교해진 마술을 만들어버린 오늘날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교한 과학기술의 세기에 모든 것의 신비로부터 벗어나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마술 속에 빠져 살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것도 사실은 마술이다. 현실의 법칙은 뉴턴 과학에 의지한다. 미시세계는 양자역학에 의지한다. 지구 밖의 상황은 상대성이론에 의지한다. 미시세계와 현실의 경계와 현실과 지구 밖의 경계에 회색지대(grey zone)가 존재한다. 이 회색지대는 어떠한 법칙으로도 규정할 수 없다.
김여운 작가의 문제 의식은 이러한 차원과 맞닿아있다. 작가는 세계를 과학이나 표준 수치로 파악하는 행위를 진리라고 생각하는 판단에 의문을 제기한다. 회화에서 사용되는 캔버스라는 틀 역시 사회의 제도를 닮았다. 고정된 하나의 시점을 정해서 최대한의 내용과 기법을 담아내라고 요구한다. 그것은 정지된 한 순간의 사건을 표상한다. 일종의 정지된 프레임의 화면이다. 그런데 작가는 유동적인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고 싶었다. 캔버스를 비정형적으로 비틀어 짜거나 캔버스를 벽이 아닌 공중에 매다는 발상은 통쾌한 해방감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기존의 관념을 허물기 위해서 펼치는 전략적인 아방가르드 시도가 아니다. 우리의 시각에 대한 문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바라보고 만지고 느끼는 세계가 실은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이를 쇼펜하우어는 표상이라고 불렀고 불교에서는 오온(五蘊)이라고 한다. 완벽하다고 생각되는 우리 시각은 불완전하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캔버스 화면처럼 안정적이지도 않을뿐더러 몸이 움직이면서 늘 따라서 움직이며 보고자 하는 것만 보게 된다. 세계 자체를 전일하게 파악할 수가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는 시간 차이와 관심의 시야로 만들어낸 파편들의 모자이크(짜맞춤)이다. 관심 영역 밖에 있던 나머지 모든 것은 무의식이라는 하수구로 흘려 보낸다. 김여운 작가의 신작 시리즈가 모빌처럼 공중에 매달리는 이유이다. 우리의 의식은 낱개의 시각 파편들을 시간이라는 축과 신체의 움직임이라는 축으로 쌓아 올리면서 눈앞의 현상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김여운 작가는 현상학적 분석을 토대로 세계와 회화의 본질과 한계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이렇게 회화의 본질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예술은 다가올 미래의 예고편이다.”는 문장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한다. 예술에서 벌어진 일들이 현실에서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기는 힘들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패러다임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해하기 쉽다. 특정 시기에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을 패러다임이라고 한다. 이 패러다임은 연속선상으로 발전하는 선적 모델이 아니다. 그것은 단절되기도 하며 때로는 나선적이고 유동적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패러다임은 과학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아티스트들이 먼저 선취해서 보았던 꿈과 비전에서 비롯될 때가 많았다. 김여운 작가는 외부세계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먼저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진정한 타인에 대한 이해와 포용은 나에 대한 절실한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아가 인간에 대한 절실한 이해는 세계에 대한 바른 이해로 도약시켜준다. 작가는 철저한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대상 · 자연 · 우주 · 세계를 작동시키는 원리의 수순으로 인식을 넓히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는 무한에 대한 사고의 실험을 거듭하려는 것이다. 더욱이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말하는 책임감이 선취되는 인식일 것이다. 작가의 사고 실험은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작가는 깊이를 더할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미처 모르고 지나갔던 우리와 세계에 대한 진실한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술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타자를 이해하자는 바람이 불 때 그러한 패러다임이 언젠가 정치 · 경제 · 사회 영역으로 확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여운 작가는 지금 매우 아름다운 시도를 펼친 것이다.
2017년 4월, 간송미술문화재단 큐레이터 이진명
인류가 시작된 이래 강자와 약자의 구분은 항상 존재해 왔다. 처음 그것의 경계가 단순히 육체의 힘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 정도에 의해 구분 지어 졌다면, 시대가 변하면서 그 구분을 짓는 가짓수는 훨씬 다양해 졌다. 대체적으로 돈과 권력이 가장 핵심이 되어 왔으나 근래에 와서는 학식, 직업, 외모 까지도 강자와 약자를 구분 짓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 것의 경계나 방식은 다양해 졌으나 태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공통적으로 폭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작가는 억압받는 이들, 그리고 황폐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동물에 비유하여 인간사회의 폭력에 대해 다소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들은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기에 충격은 더욱 크다. 놀라운 것은 김여운이 강자를 질책하거나 약자를 동정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리어 작가는 절망을 눈 앞에 두고도 인지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일종의 조소를 내비치고 있다.
2011년, 인터알리아 상임큐레이터 윤상훈
김여운의 상자들은 이름 그대로 상자이면서 동시에 창(窓)이기도 하다. 이 창을 멀리 내다볼 때 우리는 비로소 미처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을 만나게 된다.
2010년, 서울대 영문학 박사 신승한
희생에 관한 예술
김여운의 작품은 현대 자본주의 속에서 발생하는 현상들과 희생자들에 대한 김여운의 관찰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김여운이 선택한 이를 표현하는 방법은 섬세하고 우회적이다. 자연세계를 작품에 사용함을 통해 김여운은 인간의 억압과 외로움을 표현하고 김여운 작품 속의 동물들은 그러한 인간들을 상징하는, 즉 지금까지 희생당했고 지속적으로 희생당하는 인간들을 표현한다. 섬세하게 표현된 김여운의 전시공간은 흔히 볼 수 있는 실내공간을 표현했는데, 김여운의 아름답고 섬세하게 그려진 생물체들은 사실 표본들이고 디스플레이 된 사물들일 뿐 인 것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순수하고 해가 없는 동물들이지만 동시에 어딘가에 묶여있고 감옥에 갇힌 듯 한 존재들이며, 그리고 홀로 남겨진 존재들이다. 이러한 현대인들은 결국 욕망의 소비지향사회에 골동품들처럼 존재한다.
사실적으로 표현된 새와 동물을 그린 작은 캔버스들을 보는 관람자의 시선은 즉각적이고 감정적으로 작품과 교통한다. 그러나 관람자가 더 가까이에서 작품을 관찰할수록 멀리서는 당당하게 보이던 부엉이나 사랑스럽게 보이던 고양이가 사실은 퍼스펙스(Perspex)의 상자 속에 갇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이 갇혀있는 박스가 작다는 것은 억눌림과 고독, 그리고 그려진 각각의 생물체들의 물체화 됨을 강조한다. 어떤 생물체도 플라스틱 상자 속에서 오랜 동안 갇혀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 "희생된" 동물들을 통해 관람자는 두려움과 경각심, 그리고 공감대를 느낀다. 김여운의 작품은 우리의 실상을 우회적이고 잔잔히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어처구니 없이 스스로에게 저지를 죄악을 보여주는 거울 말이다.
김여운의 작품들 중 어떤 것들은 살아있는 동물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또 어떤 작품들은 "트로피" 두상들, 혹은 부분적으로 남은 몸체만 -상아를 그린 작품처럼- 그려져 있다. 토끼와 늑대가 갇힌 모습은 하나는 먹이고 하나는 먹이를 쫓는 약탈자이지만 둘 다 상자 속에 갇혀 있을 때에는 동등하게 약한 존재로 보여진다. 문들과 창문들은 탈출구를 의미하지만 이 탈출구는 동물들에게는 영원히 금지된 탈출구들이다. 주어질 것처럼 보이는 자유로운 세상은 그들의 실상을 더 잔혹하게 만들 뿐이다.
문 속의 창문에 우주를 그린 그림들은 김여운의 새로운 작품 모티브 이다. 현대 과학이 인간으로 하여금 전례 없이 이들을 교만하도록 만들었고, 잘못된 우위와 우세를 주었고, 그리고 그러한 이미지들은 관람자로 하여금 김여운의 작품을 바라봄으로 현대인 자신들의 박약함을 기억하게 한다.
2010년, 옥타비아 랜돌프. 작가